당신의 소송에 베팅한다…월스트리트의 새로운 머니게임

소송 비용을 투자자가 대신 내고 승소 시 배상금을 나누는 '소송펀드'가 글로벌 20조원 시장으로 성장했다.

버퍼드캐피털이 최근 한국에도 진출하며 국내 시장 개막을 알렸다.

당신의 소송에 베팅한다…월스트리트의 새로운 머니게임


2015년, 두 회사가 파산 직전이었다. 스페인 에너지 기업의 주주였던 페테르센 에네르히아(Petersen Energia)와 헤지펀드 에톤 파크(Eton Park)는 아르헨티나 정부에 단단히 당했다. 아르헨티나가 국영 석유회사 YPF의 지분 51%를 스페인 기업 렙솔(Repsol)로부터 강제로 빼앗으면서 다른 주주들에게는 아무런 보상도 하지 않은 것이다. 법적으로는 분명히 불법이었다. 그런데 상대는 국가였다. 소송을 걸려면 미국 법원까지 가야 했다. 변호사 비용만 수십억원이 필요했다.


결국 두 회사는 한 투자사의 문을 두드렸다. 버퍼드캐피털(Burford Capital)이 1660만 달러(약 220억원)를 들고 나타났다. "우리가 소송비 댈게요. 이기면 같이 나눕시다." 8년 뒤인 2023년, 미국 연방법원은 아르헨티나에 160억 달러(약 21조원)를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버퍼드가 건 돈 대비 수익률은 무려 3만7000%였다. 이게 바로 소송펀드(Litigation Finance)다.


◇법정이 투자판이 됐다

구조는 단순하다. 제3자 투자자가 소송 비용을 대신 내고, 이기면 배상금의 일부를 수익으로 나눠 갖는다. 지면? 투자자가 전액 손실을 떠안는다. 원고는 한 푼도 갚을 필요가 없다.


그래서 투자자들은 아무 사건에나 돈을 쏟아붓지 않는다. 사건의 법적 근거, 증거의 강도, 상대방이 실제로 배상금을 낼 능력이 있는지까지 꼼꼼히 따진다. 버퍼드캐피털의 경우 통과율은 5% 미만이다. 10건 중 1건도 채 안 뽑힌다.


이 깐깐한 심사를 통과하면 계약이 맺어진다. 변호사 비용, 전문가 증인 비용, 법원 비용을 투자자가 직접 낸다. 원고는 돈 걱정 없이 싸움에만 집중하면 된다. 이기면 합의금의 20~40%를 투자자와 나눈다.


◇이미 20조원 시장…기관투자자가 몰린다

소송펀드는 1990년대 호주에서 처음 등장해 영국·미국으로 퍼졌다. 이제는 싱가포르·홍콩을 거쳐 아시아 전역으로 번지는 중이다. 글로벌 소송금융 시장은 2024년 기준 약 152억 달러(약 20조원) 규모로, 2030년까지 256억 달러(약 34조원)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기관투자자들이 이 시장에 몰리는 이유가 있다. 주식이나 채권 시장과 상관관계가 거의 없는 이른바 '비상관 자산'이기 때문이다. 코스피가 폭락해도, 금리가 올라도 소송 결과는 그와 무관하다. 성공 시 기대 수익률은 연 20% 이상으로, 포트폴리오 다변화를 원하는 기관투자자에게 매력적인 선택지다. 헤지펀드, 사모펀드, 심지어 연기금까지 이 시장에 자본을 쏟아붓고 있다.


또 다른 사례를 보자. 영국의 한 사모펀드는 전 합작 파트너와 분쟁이 생겼다. 상대방은 자금이 풍부했고 싸움은 길어질 게 뻔했다. 법률 비용이 쌓이자 이 회사는 불리한 조건으로 조기 합의를 강요당할 처지가 됐다. 버퍼드캐피털이 1000만 달러를 투입했다. 덕분에 이 회사는 원하는 변호사를 선택해 끝까지 싸울 수 있었고, 1년 만에 두 건의 판정을 모두 따냈다.


◇한국에도 상륙했다

버퍼드캐피털이 최근 한국에 첫 사무소를 열며 공식 진출했다. 국제 중재, 특허 분쟁, 크로스보더 소송에 집중하겠다는 방침이다.


한국은 아직 초기 시장이다. 변호사법상 제약과 제3자 소송 지원을 명시한 법 규정의 부재가 발목을 잡아왔다. 그러나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론스타 사건처럼 수조원이 오가는 국제 중재에서 소송금융 활용이 시작됐고, 특허는 많지만 소송비가 없어 침해를 묵인하던 중소기업들도 새로운 선택지가 생겼다. AI로 승소 가능성을 분석하고 소송금융을 연결하는 플랫폼 모델도 국내 스타트업들이 모색 중이다.


◇이기고도 억울할 수 있다

소송펀드가 장점만 있는 건 아니다.

투자자가 수익 극대화를 위해 원고 의사와 무관하게 합의를 강요하거나 반대로 합의를 막는 사례가 생긴다. 실제로 버퍼드캐피털은 2023년 식품유통 대기업 시스코(Sysco)와 법적 분쟁에 휘말렸다. 시스코가 닭고기·쇠고기 담합 소송에서 공급사들과 합의하려 했는데, 버퍼드가 이를 방해한다며 맞소송을 건 것이다. 이기고도 투자자와 싸워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진 셈이다.


항소심까지 가면 5~10년이 걸려 유동성 리스크도 크다. 협상에서 불리한 원고가 굴욕적인 조건을 수락해 이기고도 실제 수령액이 예상보다 훨씬 적을 수도 있다.


법정은 더 이상 정의만의 공간이 아니다. 월스트리트의 자본이 들어왔다. 아르헨티나와의 3만7000% 수익률 게임처럼, 이 시장은 이미 거대한 머니게임이 됐다. 이 변화가 '돈 없는 자의 무기'가 될지, '또 다른 자본의 놀이터'가 될지는 결국 제도가 어떻게 설계되느냐에 달려 있다.

관련 기사

딥페이크, 디지털 증거의 믿음이 흔들린다

AI 딥페이크 기술이 법정 증거까지 위협하고 있다. 영상·음성·사진 등 디지털 증거를 정교하게 위조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가능해지면서, 사법 체계의 근간인 '증…

[르포]불법 바카라, 한강공원의 평화를 위협하다

한강공원 화장실에 불법 도박 사이트 광고가 붙어있다.  칼바람이 몰아치는 평일 오후,  두꺼운 패딩을 껴입은 채 강변을 걷는 사람들, 손을…

강북 모텔 연쇄살인 김소영, 살인 등 혐의 구속기소…"가짜 PTSD로 수면제 처방받아 범행

서울북부지방검찰청은 9일 서울 강북구 모텔에서 20·30대 남성들에게 약물을 먹여 사망·상해에 이르게 한 혐의를 받는 김소영(20)의 신상정보를 공개했다. 서…

이란의 아이들은 왜 죽었나…혁명수비대의 아기 방패 전술

이란 혁명 수비대 군사기지와 초등학교의 위성사진. 2월 28일 오전, 이란 남부 미나브의 여자 초등학교 '샤자레 타예베'에 폭탄이 떨어졌다. 등교일인 토요일,…

엔비디아 차세대 AI 칩, 삼성·SK HBM4만 쓴다... 마이크론은 제외

젠슨 황 엔비디아 대표가 World Economic Forum에서 연설하고 있다. (자료: 엔비디아) 엔비디아 차세대 AI 가속기 '베라루빈'의 핵심 메모리…

백악관, 이란 공습 홍보에 할리우드 영상 짜깁기…"전쟁이 장난이냐" 비판

미국 백악관 전쟁 홍보 영상(자료출처: X 캡쳐) 미국 백악관이 이란 공습을 홍보하기 위해 할리우드 영화 장면을 짜깁기한 영상을 공개해 거센 비판을 받고 있다…